봉화산 정토원
   
   
 









삼독심을 빼고 보리심을 심고 불과(佛果)를 캐자 / 청소년포교 선구자 선진규 법사(봉화산 정토원장)

글쓴이 : 烽火山法性 등록일 12-03-31 23:18     조회 3,334

    삼독심을 빼고 보리심을 심고 불과(佛果)를 캐자

     

     

    청소년포교 선구자 선진규 법사(봉화산 정토원장)

     

     

    2012년 02월 23일 (목) 15:12:47 현대불교 조동섭 기자 cetana@gmail.com

    “원장님 계신 가 가봐라.”
    “계시면 모시고 올까요?”
    “아니다…. 참 좋은 분인데….”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前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던 날, 부엉이바위에 있던 노 前 대통령과 동행했던 경호원의 대화이다. 노 前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찾았던 원장이 봉화산 정토원장 선진규 법사이다.


    4월 총선 등을 앞두고 활동차 상경한 선 법사를 2월 조계사 인근에서 만났다.

    선진규 법사는 한국 현대불교의 어린이ㆍ청소년 포교의 기틀을 잡은 장본인이다.


    1959년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한 그는 농촌계몽을 위해 봉화산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 동문수학했던 도반들과 함께 십시일반으로 돈과 원력을 모아 호미든관음상을 세웠다.


    낯선 호미를 든 관음상의 출현은 당시 동아일보ㆍ한국일보에 보도됐고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선진규 법사는 1934년 4월 김해 한림면 장방마을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노무현 前 대통령의 생가와 사저가 있는 봉화산 남쪽 기슭 반대편, 봉화산 북쪽 기슭이 선 법사의 고향집이다.


    어린 선진규는 스님이 되고 싶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목격하면서 삶과 죽음의 무상함을 절실히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내려온 북한군에 맞서 학도병으로 입대해 나라와 가족을 지키려 했지만 가족들의 만류로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미24사단이 선진규 가족 소유의 과수원에 주둔하면서 그는 군속이 되었다.


    당시 선진규의 할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으로부터 손자만큼은 살려보겠다고 손자를 미군부대에 딸려 보냈다. 보급부대와 함께 있으면 후방에 있을 것이고 혹시라도 미군이 철수하면 함께 움직여 안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부대는 최전방 보급부대였다.


    전세가 역전되면서 북진에 북진을 거듭했고, 선진규는 취사반에서 일하며 평안북도 청천강까지 넘기에 이르렀다. 가는 동안 내내 눈에 목격된 것은 불바다와 그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시체뿐이었다.


     

    “어린 나이에 전쟁의 한 복판에 있으며 너무나도 슬프고 가슴 아픈 모습들을 봤습니다. 이것이 제가 불교를 택한 이유입니다.”


     

    학도병 선진규는 1951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이 소년병들은 모두 복귀하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전방에 있던 터라 7월에서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린 선진규는 민족끼리 왜 싸우나 싶었다. 이념이 무엇인가 싶었다. 자기 주장을 타인에게 잘 전달하는데 필요하겠다 싶어 웅변을 익혔다. 웅변대회에 나갔지만 처음에는 예선 통과도 힘들었다. 그러나 선진규는 멈추지 않았다. 웅변 연습을 하고 또 했다. 그 결과, 32번 대회에 나가서 17번을 등수에 들었다.


     

    “내가 좀 끈질기게 있거든.”


    이 끈질김이 선진규를 동국대 불교학과로 진학시켰다. 그리고 그를 법사로 만들었다. 청소년수련원을 세워 전재산을 탕진했지만 그는 언젠가는 수련원 일대가 불교인재를 양성할 몫을 톡톡히 해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고교 졸업 후 선진규는 스님이 되고 싶었다. 부산공고 토목과를 졸업하고 출가를 위해 무작정 상경해 조계사를 찾았을 때, 권상로 스님(동국대 초대총장)을 만났다.


    권상로 스님에게서 “출가를 하려거든 우선 학문을 마치라”는 조언을 들었다.
    스님의 조언에 따라 1955년 동국대 불교학과에 진학했다. 박성배 뉴욕주립대 교수가 불교대학 동기다.


    “고등학교때 선생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동국대에 입학했어요. 동국대 불교학과 가는 것이 내게는 출가와도 같았어요. 입학하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눈물을 쏟으며 들어간 불교학과였는데, 교내 위상은 바닥이었다. ‘목탁과’라 놀림 당하고 있었던 것.


    불교학과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그는 전국웅변대회에 출전했다. 그리고 특등을 했다. 학생들은 모두 놀랐다. 전국웅변대회 수상 이후 달라진 것은 불교대학의 위상만이 아니었다. 선진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경전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어 학생 선진규는 해인사를 찾았다. 2학년을 마치고 3학년을 올라갈 무렵이었다. 행자생활을 하고 있는데 학교는 난리가 났다. 총학생회장 선출을 두고 4학년 학생들끼리 크게 다투자 당시 백성욱 총장은 3학년 학생을 총학생회장으로 하라는 명을 내렸다. 학생들은 대의원회의를 거쳐 학생 선진규를 총학생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선진규는 학교에 없었다.


     

    그때 학생 선진규는 행자가 되어 해인사에서 <원각경> 수업을 듣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학생과 교직원이 해인사로 선진규를 찾아왔고, 그를 학교로 데려갔다. 먹물옷 입은 채 그대로.


     

    백성욱 총장을 만나서도 선진규는 경전공부를 해야겠다고 고집했다. 그런 그에게 백 총장이 말했다.


    “이 녀석아 머리가 복잡하다고 해인사를 찾았어? 너는 머지않아 해인사의 물ㆍ바람 소리가 시끄럽다며 가야산 꼭대기를 찾을 것이고, 그 꼭대기서는 스스로 귀가 시끄럽다면 다시 내려올 것이야. 공부는 내가 시켜줄테니 그냥 나와 함께 있자.”


     

    총학생회장 선진규는 그 날부터 6개월간 매일 2시간씩 백성욱 총장에게 <금강경> 과외를 받았다. 경전공부도 하고 학생운동도 하며 선진규는 평생의 배필을 만났다.


    대학총학생회장 모임에서 당시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이던 부인 故 김기업 여사를 만났다. 김 여사는 평생 선진규 법사 곁에서 내조했다. 보건사회부 가정복지국장, 서울시 부녀아동과장 등 요직에서 목동청소년수련관 등 불교계 시설위탁에 큰 몫을 한 여성불자이기도 하다.


     

    선진규가 총학생회장을 하던 당시는 학생운동도 활발했지만,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로 삶이 궁핍한 때였다. 졸업을 코앞에 두고 선진규는 고민했다.


    ‘우리 불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나타나실까?’


    청년 선진규의 고민에 함께 공부하던 학생들이 마음을 보탰다. 1959년 호미든 관음상이 봉안됐다. 심신ㆍ사회ㆍ경제ㆍ사상개발의 4대 개발도 함께 부르짖었다.

     

     

    “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불러도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합니다. 하물며 중생구제의 원을 세운 부처님이 호미를 들고 민둥산 정상에서 개발을 위해 서 계신다면 그 원이 이룩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정토원 관음상은 호미를 들고 있습니다.”


     

    민둥산이던 봉화산 꼭대기에 호미든 관음상이 봉안됐을 때, 당시 중1이었던 노 前 대통령도 식목행사에 참여해 관음상 주위에 나무를 심었다.


     

    선진규 법사는 “노 前 대통령이 ‘일부러 부처님 근처에만 집중적으로 나무를 심었다’고 정토원에만 오면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말했다.


     

    봉화산의 유래에 대해 선진규 법사가 말했다.“옛날 가락 때(가야국) 왕족의 번영을 위해 지은 암자가 세 곳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김해 무척산 모은암(母恩菴)과 양산 인근 부은암(父恩菴)이 왕비와 왕을 위한 곳이었습니다. 아들을 위한 태자암(太子菴)이 있던 곳이 봉화산이었어요.”


     

    선진규 법사는 예전엔 봉화산이라고 안 부르고 태자암이 있다고 해서 자암산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봉오산이라 부르는 것을 1962년 전국적으로 측량조사를 할 때 선 법사가 건의해 봉화산이라고 이름하게 했다. 뒤편에 봉수대가 있기도 했지만 호미든 관음상을 통해 주창했던 4대개발의 횃불을 높이 들자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선진규 법사는 “종교는 국경이 없더라도 종교인은 국경이 있어야 합니다. 중생의 부름에 답하지 않는 종교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호미든 관음상이 봉안되자 불교계서 말이 많았다. 비구ㆍ대처 싸움 속에 서로 이를 두고 또 다툼이 벌어졌다. 청년 선진규는 불교계에 “천수천안 관음보살이라는데 그 손에 호미만 들었겠느냐”라고 설명했다.


    호미든 관음상을 봉안하고 이듬해 4ㆍ19혁명이 일어났다. 10년 후에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됐다.


    “새마을운동을 지휘한 김준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임명을 받았다며 봉화산에 왔어요. 그 분은 비서들 다 보내고 이곳에서 1주일 동안 정신적 충전을 하겠다고 했지요. 이곳에서 개발의 기운을 체득하고 갔습니다.”


     

    선진규 법사는 노무현 대통령도 호미든 관음상의 위신력으로 당선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진규 법사는 “부처님 가르침은 영원해야 한다. 정지돼 있으면 죽은 것이다”라며 “호미든 관음상은 중생의 탐진치 삼독심을 빼고 보리심을 심고 불과(佛果)를 캐자는 의미를 지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봉화산 정토원은 1920년대 자암사라 불리던 작은 암자였다. 선진규 법사가 할머니를 따라 어릴 때부터 찾던 절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자암사는 화일사로 이름을 바꿨다.


     

     

    청년 선진규는 졸업 후 백성욱 총장의 도움을 받아 봉화산 화일사를 봉화사(現 정토원)로 바꾸고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불교에서 마음과 육체가 깨끗하고 주위 환경이 깨끗하며 생사가 없는 영원한 기쁨이 있는 곳을 정토라고 합니다. 불교의 최고 이상세계를 극락정토라고 합니다. 그래서 정토원이라 이름했습니다.”


     

    청년 선진규는 불교의 이상 세계를 현실에서 구현하고 싶었다. 원(苑)이라고 한 이유는 부처님 당시 녹야원이라는 곳에서 설법을 많이 했는데 불법을 널리 알리는 차원에서 이를 인용했다. 또 어감상 좋아 그렇게 지었다는 것이 선진규 법사의 설명이다.


     

    토지 11만5703㎡(35000평), 35만원을 지원받아 창건된 봉화사는 본격적인 농촌운동의 산실이었다. 봉화사에서 선 법사는 1967년 사명대사와 만해스님 상(像)을 세웠고 1972년 조계종 중앙 상임포교사로 발탁됐다.


     

    “12명이 신청해 4명이 초대 포교사가 됐는데, 첫 월급이 쌀 한가마니 값도 안되는 거에요. 함께 포교사를 하던 무진장 스님 등은 스님이니 그렇고…나는 처자식이 있는데 그것으로 어떻게 생활을 합니까? 그래도 버텼어요.”


     

    포교사 선진규를 버티게 한 것은 ‘끈질김’이었다. 배고파서 그만 뒀다는 소리라도 들으면 다행일텐데, 재가자를 포교사로 뽑아놓으면 (근기가 약해) 금방 나간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였다.


    선진규는 조계종 상임포교사로 23년간 열심히 포교활동을 펼쳤다. 당시 무진장 스님이 332회 법문을 했고, 선진규가 그 뒤를 이어 280회를 했다. 포교사 선진규가 주로 다닌 곳은 교도소ㆍ청년회 등이었다. 선진규는 16개 지회였던 청년회를 결집해 240개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청년대회를 시작했다. 당시 만해탄신 100주년, 3ㆍ1운동 60주년에 맞춰 만해백일장도 만들었다. 첫 찬불가 LP판도 제작해 포교에 활용했다. 10ㆍ27법난을 세상에 알리는데 적극 나섰고 한일불교청년회 교류협정 체결 등 한국불교 국제화에도 뒤지지 않았다.


     

    “개신교의 YMCA에 버금가는 시ㆍ군ㆍ구 단위까지 불교청년회 지부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못했지요. 안타깝습니다.”


    청소년 포교를 위한 그의 열정은 1990년 봉화산 임야를 담보로 청소년수련원을 짓기에 이른다. 원력만으로 거침이 없었던 그는 한달 5부 이자를 물며 사채를 끌어다 썼다.

    “망할 수 밖에 없었어요. 사채 이자를 어떻게 당해내겠어요.”


     

     

    선진규 법사는 “내가 아니더라도 불교계가 경매로 날린 24만평을 되찾아 청소년 도량으로 일궈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24만평을 날렸지만 선진규는 좌절하지 않았다.


    청소년지도자 자격을 얻어 전국청소년지도자협의회를 구성했다. 만학으로 창원대 환경공학과에 진학해 ‘청소년 환경 윤리관 확립의 연구’ 주제의 논문을 발표해 청소년 문제를 남들보다 진단해 온 전문가이기도 하다.


     

    2000년 한국청소년수련협회장을 역임하면서는 “전국 공ㆍ사설 수련시설이 청소년의 심신 건강과 인성교육의 장으로 거듭나야한다”고 주장했다. 예절서당 프로그램을 창안해 전국 순회 예절 교육을 주도하기도 했다.


     

    특히, 88올림픽 때에는 기획홍보실장을 맡아 불교 문화 콘텐츠인 유등을 이용해 10만 유등 문화행사를 열기도 했다.


    선진규 법사는 얼마 전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했다. 그 이전부터는 노무현 대통령을 인연으로 민주당 노인위원을 8년째 하고 있다.

    “민주당 내에서 불교 이야기만 나오면 나를 쳐다본다. 나같은 사람이 여ㆍ야를 막론하고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야 불교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선 법사는 노무현 대통령의 49재를 정토원에서 봉행한 것도 국민들로부터 불교 이미지를 높이는데 크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진규 법사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 내가 불자이고 포교사인 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선진규 법사는 “한국불교에서 절 짓는 불사는 그만하면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제는 인재 키우는데 매진할 때이다”라고 강조했다.


    지금도 정토원에서 소임보고 봉사하는 출ㆍ재가자에게 장학 혜택을 주고 있는 선 법사는 “앞으로 엄청난 숫자의 청소년이 봉화산 정토원 수련원을 찾아 불교를 전하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 사회 이슈화된 청소년 문제에 대해 선진규 법사가 말했다.


    “교육이 중요합니다. 불교적 소양을 가진 교육이 됐다면 우리 아이들이 저렇게 아파하고 남을 힘들게 하겠습니까? 불교계가 청소년 문제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사찰마다 한명씩이라도 청소년을 키워야 합니다.”


     

    선 법사는 청소년 문제 해결방법으로 템플스테이를 제안했다. 무엇보다 더 이상 방관 말고 속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진규 법사는 대중의 부름이 있다면 4년 정도 대사회활동을 계속 펼칠 계획이다. 그러나 부름이 없다면 바로 보림에 들어가 바깥으로 향했던 자신을 수렴하며 회향할 생각이다.


     

    “정적인 수행은 저와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동적인 수행이 맞으니 지금까지 평생 포교를 해왔겠지요? 제가 누굽니까? (앉은 법사가 아닌) 선 법사입니다. 앞으로도 포교사로서 끈질기게 살아갈 겁니다.”


     


    선진규 법사는.
    1934년 김해에서 태어났다. 동국대 불교대학ㆍ대학원 수학. 국립창원대학교 대학원서 환경공학을 전공했다. 동국대 총학생회장, 전국대학생회장단 의장, 조계종 상임포교사, 대한불교청년회장 등을 역임했다.


    봉화산 정토원을 개설한 그는 88올림픽 10만 유등 기획 홍보실장, 봉화산 청소년 수련원 원장, 청소년 수련시설협회 회장, 경남도 도의원,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등을 맡으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한민족평화통일전국노인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노무현 캠프 전국불교대책위원장, 민주당 전국노인위원장 등을 맡았다. 민주통합당정강정책위원, 한국불교문인협회 회장.
    조계종은 선진규 법사의 포교활동을 기려 포교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문화관광부 장관으로부터 청소년지도자 표창을,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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